산은 부모의 마음과 같다. 깊고 넓은 품이다. 저마다 삶의 무거운 짐을 메고 산을 찾는 사람들을 산은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바라본다. 혼자 마주해야했던 냉혹한 현실 앞에 느껴야했던 절망감, 패배감을 위로한다. 삶의 길을 걷는 것 결국에는 혼자라는 외로움 또한 달래준다.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산 , 산은 품이다.
알피니즘의 거장 라인홀트 메스너가 8천m 고봉을 오르기 전날 밤 그는 호텔방에서 장비를 정검하며 울었다고 한다. 히말라야의 거센 눈을 헤지며 올랐던 매스너의 곁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그의 눈물은 연약한 인간이기에 느껴야했던 외로움과 두려움이다. 그가 산을 홀로 오르며 정상에 섰을 때 산은 그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을 것이다.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산은 언재나 포근하게 받아 주지만은 않는다. 사계절의 산중 가장 매섭게 느껴지는 산은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때 일 것이다. 한 개인이 천하보다 귀하기에 산은 준비되지 않은 막연한 자신감을 안고 찾아오는 산사람들에게 혹독한 교훈을 안겨주며 품을 허락하지 않는다.
( 주억봉정상에서 바라본 구령덕봉능선..)
메아리쳐 들려오던 웃음은 사라지고..
기암괴석들의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강원도의 산 중 지리산 깊은 산속 같은 편안함을 주는 산이 있다. 방패산 이다. 방패산(1430m)은 인재와 홍천의 경계를 이루며 주변에는 높이 1300m가 넘는 8개의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설래임으로 잠을 설치며 일어나 6시 홍천으로 차를 몰았다. 새벽 가시지 않은 어둠속 공기는 묵직하며 신선했다. 어둠이 사라지고 한산했던 도로에 서서히 차량들로 속도가 줄 쯤 차는 강원도에 다 달았다. 이름 모를 산봉우리, 봉우리들 마다 눈으로 덮여있었다. 9시가 훌 적 넘어서야 방태산 매표소에 도착했다. 매표소주차장에는 4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매표소관리인의 표정이 어둡다. 29일 폭설이 내려 무릎 높이까지 눈이 차오른다는 것이다. 관리인은 혹시 모를 조난사고를 대비해 아이젠이 있느냐 ? 전화번호를 기재하라고 하신다.
산행코스는 방태산자연휴양림을 거쳐 구령덕봉(1338m)까지 첫 구간이다. 휴양림을 거처 구령덕봉 자락에 다다를 때 50대 중반가량으로 이루어진 산악회사람들과 마주쳤다. 아주머니 세분을 포함한 일곱 분들은 눈 덮인 산을 걷는 것이 좋으신가 보다. 말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나치며 걱정이 앞섰다. 배낭도 없고 아이젠도 없어 보였다.
구령덕봉 산등성이를 타고 한참을 올라도 그칠지 모르는 웃음은 메아리가 되어 앞서 가고 있었다. 800m가 넘어서고 정상에 가까울수록 경사가 심해졌다. 위험했다.
더 이상 걱정도할수도 없었다. 모든 정신이 산에 읽혀도 중심을 잡고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구령덕봉 정상에 다다를 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람소리와 거친 숨소리 외에 이젠 더 이상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르기 보다 더 힘든 하산 길이다. 막연한 자신으로 오르려했던 사람들에게서 산은 웃음을 빼앗았다. 혹독한 교훈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쌓인 눈을 헤치며 걷는 것 산 밑 땅세상의 삶과 흡사해 보여..
구령덕봉 정상에서 주억봉(1443m)으로의 산행은 러셀산행 이다. 전날 내린 눈은 매표소관리인의 말처럼 무릎높이까지 차올랐다. 구령덕봉 정상에서 잠시 만나 몇 마디의 말을 하고 서둘러 개인산(1341m)쪽으로 발길을 돌린 산사람들이 고마웠다. 배달온산에서 눈을 헤치며 올라온 그들의 흔적이 주억봉까지 길을 안내했다.
쌓인 눈을 헤치며 걷는다는 것이 산 밑 땅 세상의 삶과 흡사했다. 눈에 가려 걷고 있는 길이 안전한지 확인할 수 없었다. 미끄러지고 굴러 떨어져야만 알 수가 있었다. 구령덕봉에서 주억봉 정상까지의 길은 산 밑 땅 세상에서 급하게 살아온 인생의 길과 같았다.
매서운 바람으로 기온은 떨어져가고 갈 길은 멀었다.
오후2시 매서운 바람을 피해가며 잠시 주억봉정상에서 휴식을 취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단지 힘들게 올라온 산봉우리들을 거슬러 바라보는 것 외에.
혹독한 시련은 풀무불속의 연단과정..
주억봉에서 지당골로의 하산 길은 풀무불속 연단과정이다. 방태산을 오르면서 걱정했던 하산의 어려움을 피해갈 수 없었다. 700m까지만 안전하게 내려간다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지당골로 향했다.
만만치 않은 경사 발을 어디로 떼어야 할지 막막했다.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겨보지만 자신할 수 없었다. 미끄러져 구르기를 수차례 어느 순간 이력이 생기자 경직된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는 것. 구르는 것. 이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쯤 우려했던 700m 경사지역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주변에는 서서히 어둠이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지당골을 지나 매표소주차장에 도착하니 5시가 되었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자 구르면서 돌부리에 부딪힌 왼쪽무릎에 통증이 느껴졌다. 치열한 하루였다.
몸은 천근만근을 진 것처럼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마주해야할 산 밑 땅 세상에서의 나날들을 위해 방태산의 품을 떠나 성남으로 향했다.